클래식

[스크랩] The Blue Danube (푸른다뉴브강) - The Vienna Boys Choir.

얼떨결 2009. 3. 15. 20:13

 






The Blue Danube (푸른다뉴브강)
An der schönen blauen Donau, Op.314
요한 슈트라우스 :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강

Sung By
The Vienna Boys Choir






Johann Strauss [1825∼1899]


왈츠! 하면 차이코프스키나 쇼팡 같은 음악가들도 있지만 
왈츠의 왕으로 불리우는 요한 슈트라우스(1825~1899)를 
첫 손에 꼽지 않을 수 없다. 
슈트라우스는 왈츠 하나만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을 대표하는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듣고 있노라면 
유럽 전역을 휘감아 흐르는 도나우 강 주변의 멋진 경치와 함께 
르노와르의 그림처럼 우아한 왈츠의 선율에 맞춰 춤추는 
멋진 남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1866년 옛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참패한 오스트리아는 
패전국의 멍에를 쓰고 정치, 경제적으로 큰 압박을 받으며 
암담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 무렵 슈트라우스 II세는 무명시인 칼 베크가 쓴 시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작곡하게 되는데... 
이 곡은 당시 의기 소침해 있던 오스트리아 국민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면서 오스트리아 국가 다음으로 
사랑받는 곡이 되었다. 
칼 베크의 시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나는 괴로움에 허덕이는 그대를 보았노라 나는 젊고 향기로운 그대를 보았노라 마치 금광의 황금처럼 도나우 강 위에,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 위에 진실이 되살아 나는 것을...
그의 많은 빈 왈츠 곡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걸작으로 1867년 궁정 무도회 악장으로 재임하고 있을 무렵에 완성하였다. 원래는 합창이 붙은 왈츠였으며 겔네르트가 이 곡을 위해 카를 벡의 시를 바탕으로 작사를 한 것이다. 프러시아로 부터 속박을 받게 된 오스트리아는 민심이 혼란했을 뿐 아니라 분위기도 암울했다. 당시 빈 남성 합창협회의 지휘자는 국 민들의 사기 앙양을 위해 슈트라우스에게 신곡을 의뢰했다. 이렇게 해서 이 곡이 쓰여진 것이며 합창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1867년 빈 초연에서는 별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같은 해 파리에서 연주된 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다. 느린 서주에 이어 5곡의 왈츠가 나타나고 회적인 후주로 연결된다.

슈트라우스 전기를 보면 당시 최고 인기스타로 군림했던 그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슈트라우스는 무지개 빛으로 빛나는 거품과도 같았다. 그의 혈관에는 샴페인의 거품이 가득 차 있었다." 실제로 빈에서는 슈트라우스의 곡이 모짜르트의 곡보다 더 자주 연주될 만큼 빈 시민들의 슈트라우스 사랑은 각별하다. '왈츠의 왕'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슈트라우스는 무려 500여 곡에 이르는 왈츠와 폴카를 작곡했는데 그의 '7대 왈츠'로 손꼽히는 작품의 연대기는 다음과 같다
    1.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1867) 2. 예술가의 생애 (1867) 3. 빈 숲 속의 이야기 (1868) 4. 술과 여자와 노래 (1869) 5. 남국의 장미 (1880) 6. 봄의 소리 (1882) 7. 황제 원무곡 (1888)
슈트라우스를 떠올릴 때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똑같다는 것 때문에 혼동을 일으키곤 한다. 우리가 흔히 입에 올리는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II세는 '왈츠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요한 슈트라우스 I세의 아들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I세는 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재능을 일찌기 알아보고 훗날 대 음악가로 성공하기까지 지극 정성으로 그를 키워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다를게 없다.

왈츠, Waltz 왈츠는 프랑스의 보르타(Volta)란 춤에서 기원하였다는 학설이 있으며 1178년 11월 9일 빠리에서 처음 추어졌다고 문헌에 남아 있어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듯 하나, 실제로 빠리에서 유행하게 된 것은 16세기부터였다. [보르타]란 원래가 「돌다」라는 뜻으로서 그 때의 춤은 원무(Round Dance)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의 어원은 프랑스의 봐르세(Volse), 독일의 왈저(Walser), 이태리의 왈즈(Walz), 영국의 왈츠(Waltz)등 모두가 빙빙돈다는 뜻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독일인들은 왈츠를 자기네의 지방무용인 「랭드라 : Landler」 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왈츠가 유럽의 전지역에서 전성기를 이루게 된 것은 슈베르트나 스트라우스 등 그 외의 많은 음악 대가들이 불멸의 왈츠 명곡들을 작곡하였다. 19세기 무렵부터였으며 이러한 빠른 템포(1분간 60소절)의 왈츠는 라운드 턴(Round Turn : 360도의 회전)을 사용하는 로타리 왈츠 (Rotary Waltz)였다. 19세기 중엽에는 요한 스트라우스 풍의 비엔나왈츠(Vienna Waltz)가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Wien)에서 시작하여 대중화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미국에선 보스톤왈츠(Boston Waltz)란 것이 발생하여 많은 유행을 하게 되었다.

새해 1월 1일 오전 11시45분(빈, 현지시간)부터 위성 생중계로 전 세계 71개국에 방영되어 수천만명이 지켜보는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에서는 언제나 앵콜곡으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다뉴브강’ 왈츠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을 연주하는 것은 오래전 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다.

빈소년합창단 (빈 少年合唱團) (Wiener Snger Knaben) 오늘날 세계 최고의 소년합창단으로, 또 오스트리아의 문화예술 사절단으로 전 세계에 맑고 청아한 음성을 전하고 있는 빈소년 합창단은 1498년 오스트리아 황제였던 막시밀리안 1세의 칙령에 의해 궁정성당에 봉사하는 성가대로 창단되어 궁정오페라단과 함께 빈의 음악 전성기를 구가했으며 오늘날에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국립오페라단과 함께 빈 궁정악단의 명성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소년 슈베르트가 이 합창단의 보이 소프라노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며 모차르트는 매일 아침 미사 시간에 빈소년 합창단을 지휘하였다고 합니다. 17세의 베토벤도 이 아름다운 합창단을 위해 반주를 맡았으며 바그너, 리스트, 요한스트라우스 등이 자신의 곡을 헌정하는 등 세계적 명성의 소년합창단입니다 제 1 차세계대전으로 합스부르크가의 제정이 붕괴될 때까지 부속학교에서 소년들의 음악교육이 계속되었는데, F.J. 하이든이나 F.P. 슈베르트도 여기서 교육을 받았다. 지금의 합창단은 1924년 재건된 것으로, 이때부터 전례(典禮)에서의 종교음악 연주 외에 빈국립오페라극장 공연에 참가해 콘서트 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48년 빈시로부터 아우가르텐궁전을 빌려, 주로 10∼14세의 단원 약 150명이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합창단은 4그룹으로 나뉘어 각각 연간 약 3개월 동안 세계 각지로 연주여행을 한다. 종교음악, 각국의 민요, J. 슈트라우스의 왈츠 편곡 등 폭넓은 레퍼토리를 자랑하며, 오페라와 영화 등에도 출연하였습니다. 지휘자 A. 토스카니니는 이 합창단을 <천사의 노랫소리>라고 평하였습니다.
 

다뉴브강 (Danube)





볼가강 다음가는 유럽 제2의 강.
영어로는 다뉴브, 독일어로는 도나우(Donau), 헝가리어로는 두나(Duna), 루마니아어로는 두나리아(Dun?rea), 불가리아어로는 두나브(Dunav) 이다.

독일 남서부에서 발원하여 중·동유럽을 동서로 흘러 흑해로 들어가는 국제하천이다. 전체길이 약 2860㎞. 유역면적 81만 7000㎢. 유역폭은 평균 280㎞. 수원은 독일 바덴지방 슈바르츠발트산지이다. 유로는 남독일, 오스트리아 북부,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 국경을 동진하고, 부다페스트 북방 약 35㎞에서 남으로 굽어 유고슬라비아로 들어가고, 베오그라드 근처에서 다시 동류하여 불가리아· 루마니아 국경을 흐른다.

하류부에서는 왈라키아평야를 북상해서 루마니아·몰도바 국경을 남류하는 프루트강과 합류, 양국 국경을 동진하며 흑해로 들어간다. 지류수는 3000에 가깝고, 빈·부다페스트·베오그라드 등을 관류한다.


유량·삼각주


알프스의 습곡산지를 2개소에서 횡단하고 알프스·카르파티아산맥, 트란실바니아 알프스·발칸산맥을 나누는데, 빈 근처부터 하류는 평야부를 흘러 경사가 완만하며, 경사가 큰 산간하천으로서의 유로는 짧다.

다뉴브강의 평균유량은 계절적 변동이 적고, 빈과 하류부의 브라일라에서의 하황계수(河況係數;최대유량과 최소유량의 비)는 빈이 4.0 이하, 브라일라가 30.0 내외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유량은 지극히 안정하다. 모든 유역의 연평균강수량은 약 750㎜, 유출률은 32.5%, 매년 공급되는 용해량은 2억 2500만t, 부유량은 5000만t이다. 이 물질들은 주로 하구 부근에 퇴적되기 때문에 삼각주의 끝을 매년 약 40m씩 전진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하구에서 상류 300㎞ 부근(루마니아의 칼라라시)까지는 삼각주 모양을 보이고 그물처럼 생긴 형상을 띠며 물줄기가 흘러간다.

특히 흑해에 들어가기 수십㎞ 앞에서 부채꼴로 열려진 3개의 지류(支流)는 북쪽부터 킬리아(Chilia)·슐리나(Sulina)· 스핀투 게오르게(Sfintu Gheorghe)라고 불린다. 강폭은 100∼130m 전후이다. 킬리아지류를 다뉴브강의 본류로 치며, 현재 루마니아와 러시아연방의 국경을 이루고 있다. 이 삼각주지대에는 무수한 호수(발타라고 한다)가 있고 수로로 연결된다.

삼각주 거점은 루마니아의 툴체아(Tulcea)이다.


항행

삼각주가 발달해서 하류부의 수심이 가장 깊은 곳에서도 5∼10m로 얕고, 더구나 하상의 변화, 유로의 변전이 현저하므로, 흘수(吃水)가 깊은 배는 하구에서 160㎞ 상류의 브라일라까지밖에 못 간다. 브라일라와 그 하류 갈라티는 루마니아의 중요한 밀[小麥(소맥)] 수출항이다.

소형선박이면 독일의 뷔르템베르크지방의 울름까지 항해가 가능하며, 남독일에서 지류 알트뮐강을 거쳐 라인강 지류 마인강으로 연락하는 마인 다뉴브(루트비히)운하를 통해서 북해 쪽으로 항행이 가능하다. 흑해로 흐른다는 것과 소형선박이면 흑해와 북해간을 연결·항해할 수 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항행하기에 가파르고 험한 곳은 유로 변화가 심한 삼각주지대와 트란실바니아 알프스와 발칸산맥을 가르는 계곡인 철문(Iron Gate) 근처의 협곡이다. 빈과 린츠 사이도 협곡을 이루어 운항하기가 쉽지 않다.

이 협곡 풍경들은 모두 세계적 경승지로서 유명하다. 하류부 삼각주 지대는 1984년 다뉴브-흑해운하(전체길이 64.2㎞)의 개통으로 다뉴브강과 흑해간이 약 400㎞ 단축되었고, 또 슬로바키아 중부에서 다뉴브·오데르운하가 완성되어 흑해와 발트해도 연결되었다.


국제하천 다뉴브강


다뉴브강은 관개와 발전에 이용되고 국제하천으로서 동유럽문화와 교역상 중요한 기능을 해 왔다. 통과국은 독일·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불가리아· 우크라이나 등 9개국에 이르며 예부터 항행권을 둘러싸고 유역 여러 나라 사이에 중대한 관심과 분규를 일으켜 왔다.

그러나 통과국수가 많은 것이 대규모의 인공적 변화를 막아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은 한 나라에만 흐르는 내륙하천으로 세계 제일인 러시아연방의 볼가강과 비교할 경우, 볼가강은 운하·수문·저수지의 연속으로 인공적 변화가 심하다는 점에서 양자는 현저하게 취향을 달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


그리스의 헤시오도스와 헤로도토스의 책에는 이미 다뉴브강 유역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로마시대 아우구스투스황제(재위 BC 27∼AD 14)는 제국판도의 북쪽 한계를 다뉴브강 기슭까지 확장하였다. 그 뒤 수세기 동안 다뉴브강은 로마제국과 이민족과의 경계선이 되었다. 그 결과 연안에 요새가 만들어져서 현재의 연안도시 기반이 되었다.

4세기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자 게르만족을 비롯하여 슬라브족·마자르인이 이 강 유역으로 이동·침입하였다. 14세기 이후 오스만제국이 발칸반도로 진출하여 강의 중·하류를 지배하에 넣었다. 18세기 베오그라드 주변지역은 합스부르크제국과 오스만제국의 경계선을 이루었다.

이 무렵부터 군사·상업상 교통로로서 중요성이 증대하였고, 연안 여러 민족은 항행의 자유가 큰 관심사였다. 1856년 크림전쟁을 종결시킨 파리조약으로 드디어 다뉴브강 항행의 자유가 보장되고, 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 등 열강을 중심으로 한 다뉴브항행위원회가 창설되었으나 연안 여러 민족은 제외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후에도 연안 여러 민족의 다뉴브강 관리 주장은 베르사유조약으로 기각되었다. 1930년대 나치 독일의 진출로 다뉴브항행위원회는 해산되었다.

1948년, 사회주의정권하의 연안제국(동유럽)은 베오그라드에 모여 다뉴브강 항행의 자유, 무장의 자유, 관리위원회를 연안제국에 한정시킨다는 취지의 협정을 체결하고, 다뉴브강 관리위원회를 창설했는데, 하천공동개발이 활발하며, 유고슬라비아와 루마니아가 협력하여 완성한 철문댐은 양국에 많은 전력을 공급하고 있다.

 

 

 

 

 

<출처;blog.chosun.com/mjkc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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